HOME > E-Technology > e-기술 > 기술용어사전 > 적정기술(適正技術, appropriate technology)

기술용어사전
 
작성일 : 15-04-25 11:05
적정기술(適正技術, appropriate technology)
 글쓴이 : 권오일
조회 : 8,450  
‘적정기술(適正技術, appropriate technology)’이란 그 기술이 사용되는 사회 공동체의 정치적, 문화적, 환경적 조건을 고려해 해당 지역에서 지속적인 생산과 소비가 가능하도록 만들어진 기술로, 인간의 삶의 질을 궁극적으로 향상시킬 수 있는 기술을 말한다. 지금까지 수많은 적정기술이 개발되어 왔다. 대표적인 적정기술 제품으로는 라이프스트로(LifeStraw)와 같은 구호 제품, 수동식 물 공급펌프(Super MoneyMaker Pump)와 같은 농업 관련 기술,OLPC(One Laptop Per Child)사의 XO-1 컴퓨터와 같은 교육용 제품 등이 있다.

적정기술 개념은 1960년대 경제학자 슈마허(E. F. Schumacher, 1911~1977)가 만들어낸 ‘중간기술(intermediate technology)’이라는 용어에서 시작되었다. 당시 슈마허는 선진국과 제 3세계의 빈부 양극화 문제에 대해 고민하던 중 간디의 자립 경제 운동과 불교 철학에서 영감을 받아, 올바른 개발이 달성되기 위해서는 중간 규모의 기술이 필요하다고 주장하였다.

중간기술은 과거의 원시적인 기술보다는 훨씬 우수하지만 선진국의 거대 기술(super technology)에 비하면 소박한 기술이다. 대단위 자본을 기반으로 대량의 제품을 생산하는 거대 기술과 달리, 중간기술은 현지의 재료와 적은 자본, 비교적 간단한 기술을 활용하여 그 지역의 사람들에 의해 이루어지는 소규모의 생산 활동을 지향하는 기술이다. 따라서 중간기술은 훨씬 값싸고 제약이 적은 기술이며, 기술이 사용되는 과정에서 인간이 소외되지 않고 노동을 통해 기쁨과 보람을 느낄 수 있는 ‘인간의 얼굴을 한 기술’인 것이다. 슈마허는 이러한 중간기술을 개발하는 것이 제 3세계의 빈곤 문제는 물론, 자기 파괴적인 거대 기술로부터 야기된 여러 문제들을 해결해줄 수 있다고 보았다. 이후, 슈마허의 [작은 것이 아름답다(Small is Beautiful)](1973)가 널리 읽히면서 중간기술 운동이 활발해진다. 당시 활동가들은 '중간(intermediate)'이라는 용어가 자칫 기술적으로 미완의 단계를 의미하거나 첨단 기술보다 열등하다는 느낌을 줄 수 있다고 생각해서 '적정기술'이라는용어를 선호하였다. 이후중간기술보다는 적정기술이라는 용어가 더 많이 쓰이게 되었다.

1960년대와 1970년대에 걸쳐 제 3세계를 위한 적정기술에 대한 관심은 점점 높아졌다. 당시 미국과 소련이 과학기술을 앞세운 경쟁에 나서고 일본과 독일이 기술 개발을 통한 산업화로 재기에 성공하면서, 과학기술이 경제 발전을 이끄는 동력으로 주목을 받기 시작했다. 특히 제 3세계를 위한 공적 원조에 있어서 과학기술을 활용하는 것이 효과적일 수 있다는 주장이 강력하게 제기되었다. 1966년 슈마허가 설립한 중간기술개발집단(ITDG, Intermediate Technology Development Group, 현 Practical Action)은 제 3세계의 빈곤 문제를 해결하고 자립을 도울 수 있는 기술을 개발하는 데 주력했다. 1970년에는 영국 서식스대학교(University of Sussex)의 몇몇 과학자들이 서식스 선언(Sussex Manifesto)을 발표하는데, 이 선언에는 개발도상국의 발전을 돕기 위해서 선진국이 과학기술을 활용한 원조를 늘려야 한다는 주장이 담겨있었다.

이렇게 제 3세계와 같이 빈곤한 지역의 경제적, 사회적 개발을 달성하기 위한 방법으로서 해당 사회에 맞는 기술을 개발하려는 노력은 계속되어 왔다. 슈마허에서 출발한 적정기술 운동이 부침을 겪었던 미국, 유럽 사회에서 ‘적정기술’ 개념에 대한 정의와 평가는 조금씩 다르다. 각 국가나 기관의 역사와 관점, 활동 방식에 따라 제 3세계를 향한 원조 활동에서 기술이 차지하는 위치, 기술의 정의와 기능, 기대 효과 등이 달라질 수 있는 것이다. 하지만, 여전히 다양한 공식적, 비공식적 단체와 연구소, 대학 등이 제 3세계에 실질적으로 도움이 되는 기술을 개발하고 원조하는 활동을 벌이고 있다는 점에서 초기의 적정기술 운동에서 보였던 문제의식과 철학은 지속되고 있다고 볼 수 있다. 특히, 2000년대에 들어서는 제 3세계에 대한 원조의 효과와 수원국의 역량을 실질적으로 높이는 문제가 부각되면서, 제 3세계에 적합한 ‘적정기술’을 개발하려는 노력이 활발해질 것으로 보인다.

초기의 적정기술 운동은 제 3세계의 빈곤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시작되었지만, 적정기술의 철학이 현대 사회의 문제에 가장 성공적으로 연결된 지점은 환경 문제에 대응할 수 있는 대안기술 개발 분야이다. 1960년대 말에는 제 3세계뿐 아니라 선진국 사회에 적용될 수 있는 대안기술로서의 적정기술을 개발하는 기관들이 생겨난다. 1969년에 미국에는 신연금술연구소(New Alchemy Institute, 현 The Green Center), 패럴론연구소(Farallones Institute) 등이 설립되어 생태학적인 관점에서 물, 에너지, 건축과 관련된 대안기술을 개발하는 연구를 진행하였다. 한편, 미국 정부의 차원에서도 적정기술 관련 기관과 부서가 만들어졌다. 에너지 보존 방안을 마련하기 위해고심하던 카터 정부는 1976년에 국립적정기술센터(NCAT, National Center for Appropriate Technology)를 설립하였고, 백악관에 태양광 패널을 설치하기도 하였다.

대안기술 운동은 각 시기별, 장소별 정치적, 사회적 분위기 속에서 다소 굴곡을 겪는다. 하지만, 전반적으로는 환경 위기에 대한 문제의식이 점차 높아지고 있으며, 이와 함께 재생될 수 없는 자원을 낭비하지 않고 생태계를 파괴하지 않는 기술을 개발하려는 노력 또한 점차 증대되어 왔다. 1970년대 후반부터는 “지속 가능한 개발(sustainable development)”이라는 개념이 만들어지고 확산되면서, 개발과 보존의 균형을 추구하면서 환경적, 사회적으로 지속 가능한 발전을 이루는 것이 전 세계적으로 중요한 문제가 되었다. 이러한 문제의식은 2000년 UN이 발표한 새천년개발목표(MDGs, Millenium Development Goals)에도 이어지고 있다.

슈마허에서 시작된 적정기술은 1970년대까지 제 3세계에 적합한 기술이자 선진국의 거대 기술이 낳는 부작용이 없는 바람직한 기술로 인식되었다. 하지만 1980년대에 들어서면서 적정기술 운동은 한 차례 몰락을 겪는다. 우선, 적정기술이 제 3세계의 빈곤 문제 등 당시의 경제 구조가 야기하는 경제적, 사회적 문제를 해결하는 데 그리 효과적이지 않다는 비판이 등장했다. 대규모 공업시설을 기반으로 급속도로 경제 발전을 이룬 한국과 대만 등의 사례가 밝혀지면서, 소규모 경제를 추구하는 적정기술의 철학이 제 3세계의 빈곤 문제를 해결하는 현실적인 대안이라기보다는 이상적이고 낭만적인 사조에 불과하다는 인식이 확산되었다. 또한, 유가가 하락하면서 당시의 경제 구조가 갖는 취약성을 지적하는 슈마허의 문제 제기가 힘을 잃으면서 적정기술에 대한 관심이 자연히 줄어들었다. 게다가, 미국과 소련의 대결 구도 속에서 거대기술을 개발하는 대형과제들이 빈번히 채택되면서 작은 규모의 기술을 지향하는 적정기술 운동이 쇠퇴하게 되었다.

적정기술 운동이 한 차례 실패를 겪은 뒤에는, 적정기술에 대한 새로운 관점과 방식이 부상하였다. 가장 큰 변화는 적정기술 운동에서 기존의 인도주의적 접근에 대한 비판이 등장하고 시장 지향적 관점이 부상되었다는 점이다. 이러한 관점의 전환을 이끈 대표적인 사람으로 국제개발기업(IDE, International Development Enterprises)의 설립자이자 [빈곤으로부터의 탈출(Out of Poverty)](2008)의 저자인 폴 폴락(Paul Polak)을 꼽을 수 있다. 그는 기존의 ‘기부의 방식’이 적정기술 운동을 실패로 이끌었다고 지적하면서, 적정기술은 좋은 의도를 가진 서투른 수선쟁이보다는 냉정한 기업가에 의해 개발되어야 성공할 수 있다고 말한다.

폴락의 운동은 그간 기술 설계 과정에서 고려되지 않았던 소외된 90%의 빈곤 계층을 자선의 대상이 아니라 고객으로 바라보고, 그들이 필요한 물건을 사기 위해 얼마를 지불할 수 있으며 어떤 의향이 있는지 배움으로써 적절한 가격의 디자인을 실현하는 것을 목표로 삼는다. 전 세계 인구의 90%를 차지하는 빈곤층 소비자들의 관심을 끌기 위해 소규모의 저렴한 기술을 설계하는 폴락의 운동은 지불 능력이 막강한 소수의 소비자를 주요 고객으로 삼아 온 기존의 상품 디자인을 정면으로 비판하는 ‘디자인 혁명’인 것이다. 2007년 뉴욕에서 개최된 ‘소외된 90%를 위한 디자인(Design for the other 90%)’ 전시회는 다시 한 번 적정기술 운동을 북돋고 있다.

현재 영국의 프랙티컬 액션(Practical Action, 전 ITDG), 독일 국제협력단(GIZ, Deutsche Gesellschaft für Internationale Zusammenarbeit, 전 GTZ), 네덜란드 개발기관(SNV, Stichting Nederlandse Vrijwilligers) 등 선진국의 기술 원조 기관들, 국제개발기업(IDE, International Development Enterprises), 킥스타트(KickStart, 전 ApproTEC) 등의 사회적 기업들, MIT의 D-lab 등 공과대학의 정규 프로그램, 그 외 수많은 NGO 단체들이 제 3세계를 위한 기술 개발 및 원조 활동을 활발히 추진하고 있다. 대안기술과 관련해서도 미국, 영국, 호주 등지에 공공 기관이 존재하며, 방글라데시의 그라민샥티(Grameen Shakti), 라오스의 선라봅(Sunlabob), 인도의 셀코(SELCO) 등 개도국 내에 설립된 사회적 기업들 역시 적정기술 개발 사업을 벌이고 있다.

최근 한국 사회에서도 ‘적정기술 붐’이 일었다고 말해질 정도로, 적정기술에 대한 관심과 활동이 급증하고 있다. 2000년대 중반부터 나눔과기술, 국경없는 과학기술자회 등 과학기술 전문가들을 중심으로 한 모임들과 굿네이버스, 팀앤팀, 대안기술센터 등의 NGO 단체들, 한밭대학교 적정기술연구소, 한동대학교 그린 적정기술 연구협력 센터와 같은 대학 내 기관 및 교육 프로그램 등이 생겨나면서 민간 차원에서 크고 작은 적정기술 개발 활동이 시작되었다. 2009년에 한국이 공식적으로 OECD 개발원조위원회(DAC)의 24번째 회원국으로 가입하면서 공적개발원조(Official Development Assistance, ODA)에 대한 정부의 지원도 점차 늘어나고 있다는 점도 적정기술 운동에 순풍으로 작용할 것으로 보인다.

적정기술은 그것을 생산하고 사용하는 과정에서 최소한의 자원을 소비하는 생태적인 기술이자, 제 3세계와 선진국 사이의 기술적, 경제적 격차를 가장 바람직한 방식으로 해결할 수 있는 도구이며, 기술을 사용하는 궁극적인 목표가 인간의 발전에 맞춰진 기술이라고 볼 수 있다. 결국 적정기술이라는 개념은 특정한 종류의 기술들의 집합을 의미한다기보다는, 우리 사회에 존재하는 기술, 그리고 그 기술과 우리와 맺는 관계를 평가하고 점검하는 기회라고 볼 수 있다. 다양한 목표 하에 다양한 방법으로 이루어지고 있는 적정기술 활동 속에서, 기술은 점점 인간다워지고 있다.

출처 : 네이버 캐스트 http://navercast.naver.com/contents.nhn?rid=148&contents_id=7805